수필

그해 봄과 여름

heaji 2024. 12. 9. 11:17

그해 봄과 여름 
김  형  수
1977년 가을에 3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이듬해 2월에 마산세관에  초임발령을 받았다, 평생을 전라도에서만 살아온 저로써는 모든 것이 낯설고 경상도지역의 언어와 풍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젊은 혈기로 직원들과 의견충돌이 종종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는 외항선이 들어오면 입출항수속을 하고24시간 배에 상주하면서 외항선에 대한 본선하역작업 유류 및 선용품공급, 선원들의 밀수행위 등을 감시하느라 본선에서 근무를 하는 승감근무였다. 2년 정도 마산세관에서 근무가 끝나고 고향인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1980년 5월 이였다. 광주에서는 시위가 확대되었고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하는 등 발포가 이루어졌고, 도청을 중심으로 무정부상태로 광주는 고립되었다. 주말에 직원들과 함께 야외 딸기밭으로 야유회를 갔었는데, 트럭에 탄 시민군들이 광주에서 외곽도로 빠져나와 목포시내로 들어오는 광경과 시내 주요 경찰서 등이 불타는 등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목격했다.
전남도청 함락을 목전에 두고 군용헬기를 투입해 발포가 있었던 광경도 있었다.
당시에 목포세관 광주출장소가 바로 도청 앞에 있었는데, 통신이 두절되어 세관의 무선 통신장비인 “TTY”가 정부의 의사소통 방식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에 한강작가의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통해서 80년 5월 광주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그 도시의 열흘간⌜잔혹한 학살의 참상⌟을 고통스럽게 되살렸다. 
불행하게도 45년이 지난 오늘날 2024.12.03. 한 밤중에 대통령 스스로 위법 부당한 내란의 계엄이 선포되어 밤사이 국회 내에 대 혼란이 발생됐고, 모든 국민들의 평온함을 깨뜨려버렸다. 또한 온 국민이 또 다시 어둠과 폭력의 트라우마(Trauma)에 빠지게 됐다.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이룩해 온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후퇴시켜 버렸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목포에서 생활할 당시 나는 “목포N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 후 다시 서울세관으로 발령받아 서울에서 지냈다, 목포를 떠나서도 목사님과 서신교환을 하던 중 목사님께서 편지가 왔다. “좋은 규수가 있으니 한번 다녀가라는 내용 이였다.” 그래서 설레임을 안고 목포에 내려가서 목사님을 뵈었다, 나는 내심 목포교회에 자매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북 정읍에 사는 자매였고 당시 서울 언니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뼈대가 있는 집안의 규수라고” 했다. 
전화번호만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언니 집은 마침 내가 근무하는 서울세관 길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언니분과 통화를 하고, 인근 커피솦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니분과 함께  나오셨다. 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지금의 처형님께서는 이런저런 것들을 물으시며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 이였다. 그래서 인근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고, 친근한 모습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청초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날 언니 분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본인도 마음에 들어 한다고...” 그래서 짧은 기간이나마 몇 번 더 만났고, 그해 여름에 저의부모님께 인사드리려 함께
고향 장흥에 내려갔다. 부모님께서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특히 부엌에서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면서 설레임을 감추지 못한 모습과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께서도 마당에서 일하시며 흐뭇해하셨다.
창연(蒼然)히 찾아드는 어둠속에,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작은방에서 나란히 누어 대화를 나누던 그날의 야릇한 행복감은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을 느꼈던 순간 이였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서 장모님을 비롯한 처가의 가족을 만나 구체적으로 결혼을 논의했다. 장모님께서는 저를 데리고 서울 명동에 있는 안경점으로 갔다. “내가 눈썹이 약하니 안경을 쓰면 좋겠다는 것이다.” 장모님께서는 굉장한 카리스마 있으신 분이다. 일본에서 여고를 나오신 분이다. 결혼 당시 처가는 정읍에서 사과과수농사를 짖고 있었다. 가족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목가적인 삶에 향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에 중매 해주신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손위 처남께서 설악산 파크호텔까지 직접운전해서 태워다 줬다. 호텔에서의 첫날밤 아내가 잠든 사이에 장모님께 감사의 편지를 썼다. 이튿날 개인택시를 이용해서 설악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머루를 따먹고 서로 포옹하고 입 맞추던 모습의 사진이 사진첩에 꽃아 있다. 아내의 처녀시절에 찍은 청초한 모습의 사진을 지금까지도 수첩에 넣어 간직하고 있으면서 그리움에 쌓일 때가 많다.
성경에는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정결한 여인”란 표현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에게 정결한 여인으로 
짝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2024. 12.>

月惠. 金 亨 洙 khyngsu@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2006년),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리더스에세이 회원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 ❈공문원문학 시인 등단(2003년), ❈별곡문학동인회 회원(장흥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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